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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샤넬 이야기
    History 2007. 7. 11. 23:14

    [명품의 세계] 여자라는 이름의 자신감 CHANEL

    마이크로 소프트의 빌 게이츠, 포드 자동차의 헨리 포드, 소니 그룹의 아키오 모리타와와 함께 패션브랜드 샤넬의 코코 샤넬이 세계의 사업가 반열에 올랐다. 이 뿐만 아니다. 중국 기업인이 가장 닮고싶은 모델로 코코 샤넬을 9번째 인물로 선정되었다. 역시 미국 컴퓨터 재벌 빌 게이츠와 GE의 잭 웰치, 호주의 미디어 재벌 루퍼스 머독과 국제금융계의 거물 조지 소로스처럼 이성적 비즈니스계 인물들이 그녀의 앞뒤 순위를 꽉 채우는 걸 보면, 다분히 감성적 비즈니스인 패션계의 코코 샤넬을 언급한 대목은 확실히 튄다.

    C자 두개가 교차된 샤넬 로고는 전세계 어디서나 볼 수 있는 부유함과 아름다움과 성공의 상징이다. 샤넬 No.5는 향수의 대명사요, 뉴욕 메트로폴리탄 박물관의 소장품이기도 하다. 전세계 영부인들이 즐겨 입는 정장은 간단하면서도 입어서 편하고 활동적이면서 여성미가 넘치는 샤넬 라인이다. 그녀가 만든 브랜드, 샤넬을 빼놓고는 20세기 패션사를 논할 순 없다. 오늘날까지 샤넬만큼 단 몇 가지 요소만으로 자신의 개성을 완벽하게 표현해내는 디자이너는 없다는데 패션 전문가들조차 의견을 같이 한다. 샤넬 라인(무릎 바로 아래 길이의 치마선)과 샤넬 재킷(실용적인 포켓이 달린 트위드 재킷처럼 이제 패션사전에 일반용어로 이 디자이너의 이름이 자연스럽게 기재되고 있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스타일을 창조해냈다" 코코라는 애칭으로 불리던 마드모아젤 샤넬은 늘 자신있는 어조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몸을 꽉 쪼이는 답답한 코르셋에서 여성들을 해방시켰고, 패션의 개념을 대중화하면서 현대 여성복의 기초를 샤넬이 만들어냈다는 역사적 평가를 되새겨본다면 이런 자신감이 지나친 것만은 아닐 것이다. 탄생 후, 60여 년간 샤넬이 브랜드가 아닌 스타일로 불리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샤넬 스타일

    짧게 자른 숱 많은 머리칼, 슬링백 슈즈, 긴 진주목걸이, 블랙 앤 화이트의 컬러, 트위드 재킷, CHANEL No. 5, 무엇보다 편견의 세상에서 캐낸 여성의 자유였던 코코 샤넬이 있기 전까지 유럽 여성들은 숨을 쉬기도 어려울 만큼 허리를 죄는 코르셋에 갇혀 있어야 했고, 갖가지 과일과 꽃으로 장식된 무거운 모자를 머리에 이고, 치맛자락으로 거리의 먼지는 다 휩쓸며 걸어야 했다. 1915년 샤넬은 좁은 치마와 넉넉한 재킷의 우아함을 몸으로 말하며, 살롱 샤넬을 열기 전까지는 말이다.

    단순함, 편안함, 명료함! 샤넬이 만들어낸 전혀 새로운 스타일은 사실 그녀 자신이었고, 그녀의 품성이었다. 가난한 행상의 딸, 12살부터 고아원에서 자라난 마르고 고집스러운 아이, 그리고 쇼걸, 부유하나 매력적이진 않았던 남자의 정부.. 성공을 거두기 전까지 그녀가 살았던 힘든 이력들..

    감추고 싶던 날들을 위해 1971년 호텔 스위트룸에서 모르핀에 취한 채 88세의 일기를 마칠 때까지 지독히도 일에 몰입했다고 전해진다. 샤넬에 대해 세인들이 기억하는 또 하나의 키워드는 사랑이다. 장 콕도, 피카소, 달리, 나진스키의 당대 예술가들과 교류하고 사랑을 나누기에 부족함이 없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최초의 후원자이기도 했던 연인, 아서 카펠에게 CHANEL No.5를 헌정했고, 2차 대전 중에는 독일장교와 사랑에 빠져 욕된 프랑스인이 되기도 했다. 어쩌면 샤넬은 자신을 모델로 새로운 품격의 숙녀를 창조한 것이다. '그대가 여자라면 기꺼이 재능을 감추라'고 말하던 남성중심의 사회에서 태어날 때의 신분을 평생토록 이어가야 하는 폐쇄된 세상에 수긍하지 않는, 사랑에 솔직한 여자가 바로 코코 샤넬이 '숙녀'라는 단어에 부여하고 싶은 스타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샤넬의 심볼

    샤넬을 대표하는 로고는 단번에 떠오르는 심벌이 있다. 간단하게 두 개의 C자가 서로 등을 대고 겹쳐있는 로고. 그리고 직사각형으로 얽힌 금빛 버클과 가죽이 백 안으로 지나가는 체인, 다이아몬드 모양으로 연속적으로 누벼진 모양이 바로 샤넬을 대표하는 이미지다. 샤넬 의상에서는 버튼이 그 로고를 대신하는데, 코코가 동경했던 장교들의 유니폼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한다.

    또 코코가 가장 좋아했던 동백꽃, 즉 카모마일 역시 샤넬을 대표하는 중요한 이미지다. 그 제조방법이 특이해서 샤넬의 진품과 명품의 구분에 있어서 이 카모마일 꽃이 달린 제품들은 쉽게 구분할 수 있을 정도다. 동백꽃잎 하나하나를 직접 하트 모양으로 잘라 특수하게 샤넬에서 제작된 다리미로 주름을 잡고, 꽃을 만들어 작업을 하는데, 언제나 수작업만으로 하고 있어 하나의 꽃을 완성하는데 한 시간정도 걸린다고 한다. 이러한 생전의 샤넬을 지금은 칼 라커펠트가 이어받아 전통과 현대미를 잘 조화시켜 놓고 있는데, 그래서 좀 더 전위적이거나 캐주얼하게 표현하기도 하면서 현대 여성들의 두 눈을 훔치고 있다.


    이 모든 것의 주인공 가브리엘 샤넬

    이처럼 그녀의 사후에도 패션사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인물이지만 인생의 시작은 행복하지 못했다. 가브리엘 보네르 샤넬은 1833년 프랑스 소뮈르에서 가난한 행상인의 딸로 태어났고, 12세 때 가난과 결핵으로 어머니를 잃고 고아원과 수녀원을 전전하는 불행한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나 까무잡잡한 피부에 정열적 외모였던 샤넬은 20살 무렵부터 타고난 스타로서의 끼를 발휘했다. 낮에는 온천에서 치료하는 사람들에게 물을 길어다 주고, 밤에는 싸구려 카페에서 노래를 부르는 샤넬을 남자들의 흠모의 대상이 되었다. Coco라는 애칭은 1905년 <Qui qu'a vu Coco dans le Trocadero>를 부르면서 얻게 된 것이다. 그 중 부르주아 집안의 아들이던 에티엔느 발상은 그런 샤넬을 상류사회로 이끌어 주었다.

    자유분방하고 매력적인 이 젊은 여성의 주변에는 소설가, 시인, 배우 등 당대의 스타일리스트들이 자연스럽게 몰려들었으며, 특히 코코가 보여주는 개성적인 옷차림에 반해버리고 만다. 샤넬은 배우인 이모와 친구들을 위해 모자를 만들기 시작했는데, 점점 큰 인기를 얻게 되자 캉봉 거리에 전문숍을 내고 패션계에 본격적으로 뛰어들기 시작했다.

    1차 대전이 발발하면서 남성 대신 일해야 하는 여성들이 많아졌다. 샤넬을 헐렁하면서도 자유롭고 유연성이 뛰어난 여성 스포츠 웨어를 만들 결심을 한다. 또, 여성들에게 남성 승마복 같은 편안한 여성정장을 입혔다. 남성복에서 빌려온 디자인을 여성적으로 스타일을 창조해 낸 것이 샤넬의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다.

    모자상을 출발로 패션업에 뛰어든 샤넬은 그때까지만 해도 남성의 속옷재료로 쓰이던 저지를 사용해 예전과 완전히 다른 실루엣의 편안하고 실용적인 여성복을 디자인함으로써 코르셋과 패티코트로 칭칭 감겨있던 여성의 몸을 해방시켰다. 그녀는 자신의 갈색 머리를 자르고, 단순하고 입기 쉬운 드레스, 소매 없는 파티 드레스.. 이러한 활동적인 샤넬 스타일은 그 당시 여성들에게 자유를 선물해 줬고, 당시로서는 의류 혁명이라고 불릴 만큼 파격적인 사건이었다. 길고 꽉 쪼이는 옷에서 벗어나 루즈하고 신축성 있는 옷으로.. 이것은 가히 혁명이라고 할 수 있는 변화였으며, 이제까지의 여성관에 변혁을 가한 발명이라고까지 평가되고 있다.

    사실 샤넬의 성공을 보면 1차 대전이 큰 득이 되어주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2차 대전은 그리 큰 득이 되진 못했다. 전쟁으로 인해 독일인과의 관계가 편안치 못하자 스위스로 가기로 결심하고 1954년 회사는 문을 닫게 된다. 이로써 샤넬의 경력에 경종이 울릴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코코 샤넬은 71세라는 나이로 은둔해 있던 곳을 떠나 다시 파리에 부티크를 열었고, 그 유명한 장식 끈을 단 트위드 투피스가 만들어졌으며, 이 투피스의 성공으로 회사는 다시 일어서게 되었다. 샤넬은 약간 엄숙한 복장에 그녀 특유의 개성을 불어넣기 위해 진주 목걸이와 팔찌로 장식했고, 서슴지 않고 보석에 환상을 불어넣었다.

    샤넬에게는 아주 특별하고 강한 마력이 있었다. 샤넬의 아이디어는 당시의 모든 것을 시대에 뒤쳐진 것으로 보이게끔 하였다. 다른 사람과 전혀 다른, 자신의 스타일에 맞게 재단된 패션과 액세서리, 향수, 보석으로 보수적인 여자들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켰다. 특히 샤넬의 보석 사랑은 유난했는데, 당시 바로크시대에서 영감을 얻고 펼친 자유롭고 풍성한 디자인의 보석들은 보석이 사치스럽고 거만한 귀족들의 소유물이라는 고정관념을 완전히 뒤집어 놓았다. 그런 샤넬의 보석 취향은 사랑했던 남자들에게서도 많은 영향을 받았는데, 특히 러시아 대공작이었던 디미트리는 화려한 비잔틴 예술과 궁정의 여러 보물들을 소개해줬고, 엄청난 갑부였던 웨스터민스터 공작은 최고의 품질을 자랑하는 보석들을 선물해주면서 럭셔리의 진정한 의미를 일깨워주기도 했다.

    이처럼 샤넬의 또 다른 공로는 바로 토털 패션의 개념을 도입했다는 거다. 메이크업부터 향수, 액세서리, 드레스에 이르기까지 샤넬은 그야말로 여성의 외모를 완벽하게 장악하고자 했다. 아니 완벽한 아름다움을 갖추도록 도와줄 수 있는 진정한 스타일리스트였다. 샤넬을 시대를 앞서가는 대담한 감성과 판단력으로 모던한 패션을 창조했고, 무엇보다 개성을 강조하고 있다. 자유롭고 활동적인 여성을 위한 부드러운 소재, 통 넓은 바지, 짧은 원피스와 루즈한 외투, 여유로운 실루엣의 재킷으로 단순하고 편안하면서도 우아한 멋을 잃지 않는 디자인으로 패션사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써갔던 것이다. 이런 스타일이 오늘까지 이어지면서 '샤넬 룩'이라는 하나의 이미지로 자리잡고 있다.

    은퇴 후, 일흔이 넘은 나이에 다시 숍을 연 샤넬은 칼라 없이 트위드로 만들어진 단순한 디자인의 투피스를 발표했고, 세상은 놀랐다. 샤넬의 다양한 인조보석과 진주를 곁들인 액세서리 컬렉션도 이 시기에 디자인된 것이다. 샤넬의 상징과도 같은 골드 체인의 퀼트백, 블랙과 베이지의 콤비 슈즈, 우아하면서도 다리선을 가장 아름답게 살려준다는 샤넬 라인은 여성을 편안하게 해방시켜주는 기본적 컨셉트는 간직한 클래식으로 평가된다.

    그녀의 생애는 이렇게 압축된다. 1883년 8월 19일 프랑스 소뮈르에서 태어나 1971년 1월 10일 파리에서 사망할 때까지 패션계의 여왕으로 군림하다! 이 한 문장으로 20세기 세계의 패션사의 큰 맥이 비로소 자리 잡혔다. 코코 샤넬은 1971년 1월 10일 리츠에서 혼자 숨을 거두었다고 한다. 그녀를 잊지 못한 패션 피플들, 크리스찬 디오르와 발렌시아가의 디자이너가, 샤넬 아틀리에의 재봉 담당자가 샤넬 스타일을 충실히 이어주었다. 1983년 칼 라커펠트가 나타났고, 샤넬 룩에 경의를 표하는 컬렉션을 디자인하면서 회사는 마비상태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샤넬이 죽은 1971년 이후에도 샤넬이라는 브랜드에 대한 여성들의 신뢰는 식을 줄 모르고 있다. 잠자리에서 무엇을 입느냐는 질문에 거침없이 "샤넬 No.5만 입는다"고 대답한 마를린 먼로의 한마디는 샤넬에 대한 여성의 충성심을 단적으로 드러낸 에피소드다.

    피카소는 그녀를 <유럽에서 가장 감각있는 여자>라고 언급한 바 있다. 조지 버나드 쇼는 <세상을 놀라게 하는 패션>이란 타이틀로 그녀를 칭송했다. 그러나 샤넬의 삶은 언제나 두 개의 다른 상징 사이에 놓여있었다. 세상의 규칙과 상관없었던 그녀의 삶은 여성적이라기 보다 양성성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예술과 사업, 자립과 종속, 사교와 고독, 부드러옴과 엄격함이라는 패러독스 위를 찬란하리만큼 빛나는 줄타기를 하며 샤넬 내면으로 통합시켰다.

    지금 샤넬 하우스는 두 명의 거장이 지키고 있다. 83년부터 샤넬 전담 패션 디자인을 맡은 칼 라커펠트는 혹시 샤넬의 숨겨둔 아들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샤넬의 정통 후계자로 인정받는다. 기성복과 맞춤복인 오뜨꾸튀르, 액세서리 디자이너인 라커펠트는 샤넬의 문화적 유산! 에 걸맞는 열정과 독창성, 고급스러움을 한결같이 지켜가는데 성공했다. 샤넬의 정신을 완벽하게 자신의 것으로 만든 라커펠트는 샤넬이 최고의 디자인 하우스로 남아있기 위해 변화를 시도했다. 근본적 스타일은 잊지 않되 보다 창의적이고 미래적인 디자인을 시즌마다 제시하면서 1900년대 초, 마드모아젤 샤넬이 누렸던 개척자의 칭호를 다시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또 다른 거장은 향수병과 포장지, 심벌을 디자인하는 자크 엘루다. 디자인계에서 명품으로 인정 받고 있는 코코, 에고이스트 같은 샤넬 향수병과 샤넬 시계를 디자인한 주인공! "패션은 지나가도 스타일은 남는다"는 창업자 신념이 지금도 살아있는 것이다.


    샤넬의 진정한 후계자 칼 라커펠트

    20세기 가장 축복받은 디자이너로 꼽히는 칼 라커펠트(Karl Lagerfeld)는 샤넬을 또 한번의 패션전성기를 누리게끔 한 장본인이다. 60년대 초, 클로에에 합류하면서 세계적인 명성을 쌓은 바 있던 라커펠트는 1983년을 끝으로 클로에(이제는 스텔라 매카트니가 맡고 있음)를 떠나 샤넬의 꾸뛰르 컬렉션과 기성복 디렉터로 자리를 옮겼는데, 샤넬 고유의 클래식한 아름다움과 트렌드를 절묘하게 조화시키는 능력은 샤넬 부티크를 패션 최고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데님 미니 스커트와 전통적인 박스 재킷, 샤넬의 동백무늬를 가슴에 대담하게 붙인 블랙 망사 보디 스타킹, 저지 스커트와 가죽 재킷에 레이스가 달린 부츠를 선보인 1991년 컬렉션은 최고의 극찬을 받으면서 샤넬에서의 위치를 확고히 했다. 칼 라커펠트는 샤넬의 분위기를 이끌어야 하는 보수성을 안고 있지만,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데 있어 대담성을 갖추고 있다. 1983년 샤넬을 맡은 이후로 칼 라커펠트는 다양한 재능을 누르는 전통은 적절히 피하면서 샤넬을 보여주는 핵심 요소들은 빼놓지 않는 방식으로 샤넬의 발전에만 몰두했다. "과거를 본보기로 더 나은 미래를 나아간다" 라커펠트가 종종 인용하는 괴테의 말은 샤넬의 오뜨뀌뛰르 컬렉션마다 받는 열렬한 갈채를 뒷받침하는 증거로 '코코 샤넬의 뒤를 이을 디자이너는 없다'는 선입견을 보기 좋게 깨주었다.

    그렇지만 25년 넘게 코코 샤넬 없이 유지되어 온 지금, 샤넬 하우스는 새롭게 변화하며 더욱 신비한 그 무엇인가로 사람들을 유혹해야 하는 중요한 시점에 서있다. 항상 새로운 것으로 눈을 돌릴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세계적인 명성과 코코 샤넬이 창조한 전설, 칼 라커펠트를 비롯한 샤넬 하우스의 디자이너들은 좀더 모던하면서도 절대로 샤넬 고유의 품위와 정통성을 잃지 않는 이미지를 착실히 다져왔다.


    성공의 키워드

    패션에 관심이 많지 않은 사람이라도 샤넬이라면 금방 어떤 스타일을 떠올릴 수 있다. 어쩌면 고아원에서 보낸 어린 시절은 이후 샤넬의 창작 세계에서 화려한 컬러를 선호하게 된 기본이었는지도 모른다. 브랜드 못지 않게 그녀 자신이 유명한 인물이 된 이유는 샤넬의 적극적이고 화려했던 일 밖의 사생활과도 무관하지 않다. 본명은 가브리엘 샤넬(Gabrielle Chanel)이지만 코코 샤넬이라고 더 널리 불리는 그녀는 70세가 넘어서도 숍에 나가 피팅까지 관여할 정도로 대단했던 일에 대한 열정, 러시아와 영국, 미국을 넘나들며 활동하던 성공을 향한 의지, 어려움에 강하게 대처하는 용기도 어린 시절에 형성된 것이다.

    1971년 자신의 아파트에서 홀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삶은 영화처럼 드라마틱했다. 낮에는 의상실 견습공으로, 밤에는 클럽에서 가수로 전전하던 20살의 젊은 여성은 부유한 남자들과 사랑에 빠지고 헤어짐을 반복하면서 자라온 환경과 전혀 다른 상류사회를 체험하게 되면서, 당시 여성들의 거추장스런 드레스 안에서 제대로 거동도 못할 때 경마장에서 심플한 투피스나 승마바지를 입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녀 자신이 '샤넬의 모델'이었고, '샤넬의 홍보실장'이었으며, '걸어다니는 카탈로그'였다. 그 시대는 코코 샤넬처럼 적극적인 디자이너가 없었으므로 더욱 사람들은 관심을 기울였다. 심플한 의상에 섬세한 아름다움을 첨가하는 자신의 의상철학을 실생활에도 똑같이 적용했고, 이질적이지 않은 자연스러운 샤넬 스타일을 창조했다. <샤넬 룩>이 <샤넬 스타일>로 자리 잡히고, 한 세기를 성공적으로 대표하게 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물론 두 가지 이유들이  모두 시대를 잘 타고난 샤넬의 행운이랄 수도 있지만.

    첫번째는 이 시대에 사물에 대한 견해를 크게 변화시켰던 혁신적인 모더니스트 이론과 샤넬 스타일 사이의 유사성이다. <덜함이 더함이다, Less is more>라는 이론과 샤넬의 심플한 디자인은 절묘하게 맞아 떨어졌고, 그녀의 디자인을 보는 사람들의 호응도 높아졌다.

    두번째는 그녀의 진보적인 태도다. 샤넬은 디자이너라는 보잘 것 없던 지위에 정면 도전한 선구자적 인물이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스스로 모델이 되어 자신의 욕구와 침착한 논리를 믹스한 디자인을 전개하면서 그녀는 자신만의 독특한 스타일을 인상적으로 부각시키는데 성공했다. 샤넬은 고객과 더불어 그 시대를 풍미한 예술가, 정치가, 지식인, 사회적 인물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당대를 이끌었다.

    코코 샤넬은 "나는 어떤 일이건 대강 해 본적이 없다"고 말한 적 있다. 자신 작품의 최고 모델이었고, 홍보 담당이기도 했지만, 일상에서조차 훌륭한 이야기꾼이었고, 플라이 낚시의 명수였으며, 뛰어난 기수이기도 했던 샤넬은 자신에게 닥친 모든 도전을 받아들여 승리를 얻어냈다. 일과 사랑까지 샤넬은 자신이 경험한 모든 것들로부터 새로운 영감을 받아내는 능력이 있었다고 한다. 코코가 한 유명한 말 중에 "사람들은 나의 옷 입은 모습을 보고 비웃었지만, 그것이 바로 내 성공의 비결이었다. 나는 그 누구와도 같지 않았다"고 한 말이 있다. 이 말은 예술은 생활이며, 자기 자신의 의지에 대한 솔직한 표현이란 것을 느끼게 한다. 칼 라커펠트 역시 "반항적이고 변덕스러운 코코 샤넬을 가장 좋아한다"고 말할 만큼 샤넬 스타일은 코코 자신의 품성이었던 것이다.

    "스무살의 얼굴은 자연의 선물, 쉰살의 얼굴은 당신의 공적이다"      
    "샤넬은 스타일이다. 패션은 변하지만 스타일에는 변함이 없다"      
    CHAN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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