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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석 브랜드의 귀족, 까르띠에
문화적·대중적 흐름을 놓치지 않으면서 최고의 예술품을 만들어내는 것. 이것이 지금도 '보석' 하면 Cartier로 통하는 이유일 것이다. 까르띠에는 보석장식품을 기반으로 고급시계에서 핸드백, 라이터 등 악세사리까지 취급하는 프랑스의 세계적 브랜드. 한때 윈저 대공작 부인이 소유했던 까르띠에 보석 장식품이 부인의 사후에 열린 경매에서 자릿수를 잘 못 셀 정도의 고가로 낙찰되었던 일은 지금까지도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처럼 고급 보석장식 뿐만 아니라 화이트, 옐로우, 핑크의 삼색이 어우러져 만들어낸 3골드의 트리니티링과 연인의 손을 빌려 드라이버로 비스를 벗기고 착용하는 러브브레이슬릿 등 심플하면서 유니크한 스타일로 유명한 까르띠에는 세밀한 구조와 화려한 장식성을 자랑하는 진정한 보석의 명품으로 손색이 없다. 특히, 까르띠에의 상징이 된 판타무늬와 3골드의 트리니티링은 사랑과 우정, 충성의 심볼로써 불멸의 디자인이 되었다. 또한, 까르띠에의 이니셜 C를 두개 합친 로고를 모티브로 한 것과 러브브레이슬릿 등 까르띠에는 소재와 기술의 끊임없는 혁신에 의해서 언제나 시대의 첨단을 걷는 감성과 모더니티의 공존을 느끼게 한다. 요약하면 시대를 초월하는 매력이 까르띠에라는 명품을 더욱 빛나게 하는 것이 아닐까
보석상의 왕이요, 왕의 보석상 Cartier 1847년 네덜란드로 거슬러 올라가보자. 그곳에는 까르띠에가 있었다. 당시 루이 프랑소와 까르띠에는 파리의 유명한 보석상인 아돌프 피카르의 수제자였다. 그가 파리 몬토르게이 거리에 있는 피카르의 보석상을 인수하면서 지금까지 무려 152년의 역사를 이어온 것이 바로 까르띠에. 보석은 물론, 시계와 향수산업에서도 정상의 자리에 위치한 까르띠에는 귀족의 명품에서 이제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고위층 인사들과 유명 스타가 가장 선호하는 고급 브랜드로 자리매김 했다.
1856년, 나폴레옹이 프랑스를 지배하던 시기가 끝나고 이후 파리는 활기를 되찾았다. 파티와 무도회는 끊이지 않았으며, 두 번째의 프랑스 왕정은 각 분야에 있어 사업 확장을 장려하였다. 1853년 까르띠에는 황제의 첫 번째 사촌이었던 마티드 공주의 후원으로 사업을 확장, 파리 상류층 심장부였던 이탈리아 대로 Boulevard des Italiens 9번가로 또 한번 사업장을 옮긴다. 루이-프랑소와 까르띠에는 유지니 황후의 주목을 받게되고, 세계적으로 유명했던 재봉사인 윌스 Worth와 친구가 되는데 이것은 훗날 그들 가족의 결혼으로까지 이어져 오랜 우정을 지속하는 계기가 되었다. 루이-프랑소와 까르띠에는 가문의 전통을 세우기 위하여, 그의 아들이었던 루이 프랑소와- 알프레드(Louis-Francois-Alfred, 1841-1925)에게 기술을 가르쳐 사업에 참여 시키고 1874년, 알프레드는 회사 경영을 인수 받았다. 그 후, 알프레드는 다시 그의 첫번째 아들인 루이와 동업을 시작. 1899년 까르띠에사는, 우아함과 고급스러움의 중심부였던 뤼 드라 빼 rue de la Paix 13번지로 옮겨 새로운 장을 열었다. 그리고 그곳에서 까르띠에는 미래의 대망을 세우게 된다. 그 이후로 알프레드는 그의 세 아들에게 까르띠에를 맡김으로써 국제적 도약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알프레드의 세 아들 중 가장 뛰어난 사업 감각과 천재적인 창조력을 지닌 루이(Louis: 1875-1942)는 뤼 드라 빼에 있던 사업장을 관할했다. 1902년 루이는 자끄(Jacques, 1884-1942)와 피에르(Pierre, 1878-1965)로 하여금 각각 런던, 뉴욕에 지사를 세우도록 하였고 두 줄로 된 흑진주 목걸이와의 교환 조건으로 얻은 뉴욕 5번 가의 모트 플랜트 빌딩 Morton Plant Building은 훗날 까르띠에 인터내셔널사의 본부가 된다. 단지 두 세대 만에, 까르띠에는 세계적으로 가장 유명한 보석상으로 자리를 잡게 된 것. 웨일즈의 왕자에 의해 "보석상의 왕이요, 왕의 보석상"이라 칭송 받은 까르띠에는 장차 왕의 대관식에 쓰일, 보석이 박힌 27개 왕관의 제작을 위임받는 영광을 안기도 하였다. 1902년에 왕위를 계승한 에드워드 7세 역시, 1904년 영국 황실의 보석상이란 명예를 까르띠에에 부여했다. 이와 같은 명예는 그 후 스페인, 포르투칼, 루마니아, 이집트 왕실, 올리언즈 일가, 모나코 왕국, 그리고 알바니아 왕실에까지 이어졌으니 그야말로 까르띠에의 황금기였던 것. 지금의 까르띠에는 어쩌면 과거의 찬란한 빛에 의해 가려지고 있는 지도 모르겠다.아들들, 그리고 협력자들 세 아들
까르띠에의 자식 농사는 성공이었다고 본다. 흔한, 피흘리는 자식끼리의 세력 다툼도 없었고 오히려 사업 확장을 위한 그들의 노력으로 초일류 명품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으니 말이다.세 아들은 최상의 고객 확보를 위해, 고급 살롱 안에서의 고객 유치뿐만이 아니라 세계 전역으로 여행하였다. 피에르는 그의 형 루이의 부탁으로, 피터 칼 파베제와 경쟁하기 위해 러시아로 건너가게 되고, 그곳에서 최상의 에나멜과 단단한 석재의 동물상을 만들었다. 1910 년에는 뉴욕의 이블린 맥린 부인에게 "희망"이라 이름 붙은 유명한 푸른 다이아몬드를 팔기도 했고 Rockerfeller, Vanderbilt, Gould, Ford 가문 등 세계적인 재계와 근대산업계 고객들과의 관계를 돈독히 하였다. 런던 기반의 자끄는 페르시아만의 아름다운 진주를 찾기 위해 여행. 인디아로 건너간 자끄는 마하라자(Maharaja: 인도의 왕자)의 부탁을 받아 다양한 색체의 보석들과 까르띠에 디자인을 접목시키는 재창조 작업을 했다. 또한 자끄는 피에르와 역사적으로도 유명했던 유서포브 Yussupov 왕자의 전설적인 진주의 다량 구매를 담당하기도. 맏형 루이는 파리에서 러시아로 귀족 고객들을 확보하고, 세인트 페테르스부르크에서 몇 번의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루이는 플라티늄을 도입, 보석계의 혁신을 가져왔고 그것은 ,루이 13세 스타일을 새롭게 한 "화환 garland" 스타일을 완벽의 경지에까지 올려 놓았다. 위대한 걸작품의 창조자이며 심미인과 사업 감각을 동시에 갖춘 루이. 미스테리 클락 mystery clock과 같이 종종 특허권을 받아내기도 한 시계제작에 있어서는, 독특한 기교와 기술적인 완성을 예술적인 감각과 접목, 고급 액세서리 제작에 적용시켰다. 그는 보석 전문가로서의 잠재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식견과 사업자적 기질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것.
창조적인 크리에이터들
루이의 주위에는, 번뜩이는 아이디어로 많은 영감을 제공해 준 최고의 공예가인 디자이너 Charles Jacqueau를 비롯, Maurice Couet, Edmond Jaeger등이 있었고, Jeanne Toussaint과 같이 헌신적인 협력자도 있었다. 그는 전통적인 디자인이나, 희귀한 발견물, 어느 것에도 구애받지 않고 그것들을 그의 창조물에 자연스럽게 조화시켜 성공을 거두었고 그 모든 것이 그들 고유의 스타일, 즉 까르띠에 스타일로 연결되어 진다.
다양한 문화권의 영향을 받은 찰스 자끄는 특별히 이집트, 페르시아, 러시아와 동양 문명에 관심이 높았으며 러시아의 발레에서 많은 영감을 받기도 한다. 루이 까르띠에 가 지닌 본능적인 감각에 힘입어 자끄는 강한 색채감을 오닉스, 산호와 같은 새로운 재료에 적용, 보다 기하학적인 모양의 보석을 디자인했고, 1925 년 이후 계속 진행 중이던 "아트 데코(Art Deco)"의 새로운 스타일을 선보인다. 뛰어난 시계 전문가인 모리스 쿠에와 함께 자끄는 1850 년경 시작된 루베르-오당의 원칙을 응용, 미스테리 클락의 성능을 발견, 향상시켰다. 1888년, 처음 선보여 1911년까지 이어지는 손목시계의 성공적 판매 기록은 산토스 시계의 놀라운 성공에 기인. 최초의 산토스 시계는 1904년 브라질의 비행사인 알베그토 산토스-듀몽을 위한 선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 산토스 시계 이후 1907 년에 에드몬드 에거와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 특허를 받은 손목시계 버클과,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군용 차량에서 이름을 딴 '탱크' 디자인이 탄생했다. 한편, 코코 샤넬의 친구이자 권위주의자였고, 놀랄만큼 숙련된 기술의 소유자인 지안 투상은 품질 평가에 대한 뛰어난 능력을 인정 받아 루이 까르띠에와 함께 일하게 된다. 시작부터 그녀의 판단은 완벽했고 어떤 실수나, 판단의 착오도 용납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루이 까르띠에의 보석을 샤넬, 디올, 발렌시아가, 쉬어파렐리와 같은 오뜨 꾸뛰르(Haute Counture: 파리에서, 최신 유행의 숙녀복을 만들어 내는 고급 의상점)처럼 필수적인 부분으로 인식하게 된 것.1923년, 찰스 자끄는 새로운 스타일의 고급 악세사리 디자인을 위해 "S"라 불리는 부서를 만들었고 (원래는 Les Must de Cartier의 아이템) 그것은 그들의 제품을 보석으로부터 보다 광범위하게 대중적인 것으로 확장하기 위한 첫 번째 시도가 된다. 1933년, 루이 까르띠에가 지안 투상에게 최고 보석류에 관련된 일을 위임시키기 전부터 업무의 상당 부분이 계속 그녀에 의해 운영되어 왔다. 같은 해, 까르띠에는 "미스테리 세공"으로 널리 알려진 "보이지 않는 보석받침"을 발명, 특허를 얻는다. 1928년부터 1930년 사이 아트데코 스타일로부터 벗어나 소위 '백색의 시기'라 불리는 표류기간이 등장했다. 그것은 바로 플라티늄과 수정, 그리고 갸름한 네모꼴로 세공된 다이아몬드인 "바게트 baguette"가 복합적으로 유행하던 시기. 이와 같은 근대적이고도 수수한 디자인은 1912년경의 루이 까르띠에 디자인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 당시, 자연주의로의 희귀를 느끼던 지안 투상은 윈저 공작부인, 바바라 허튼, 그리고 니나 다이어와 같은 최대의 고객을 위해 꽃, 식물과 같은 식물상, 그리고 팬더와 호랑이 같은 동물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루이 까르띠에의 경영 하에서, 개혁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모든 형태의 보서 예술을 진보시켰으며 보석류, 시계, 악세서리를 예술 표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로 올려놓았고 사람들은 그것을 '까르띠에의 예술'이라 칭송하였다. 동시에 그는 고가품 시장을 새로이 열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기도.
손목 시계의 탄생배경 파리의 사교계에 한사람의 중요한인물이 등장한다,그는바로 브라질 커피왕의아들인 알베르토 산토스듀몽(Alberto Santos-Dumont)인 것. 그는 상당한 재산가이며 비행기제작에 대한 꿈을 실현에 옮기고 싶어하던 중이었다. 당시 루이까르띠에도 젊은나이에 보석상을 경영하면서 사교계에서 왕자(?)로 통하던 시,절 둘은 파리의 한 파티장에서 마주친다,산토스를 발견한 루이는 그에게 다가가서 "어디서 오셨습니까?뭐하시는분 입니까?라고 하니 산토스는 "나는 새(鳥)요"라고 유럽특유의 유머와 재치로 답. 루이는 산토스에게 호감을 갖고 둘이는 친구가 되었다. 그러던 중 산토스는 루이에게 "비행을 해야하는데 지금의 회중시계는 불편해서 비행이 어렵다" 라고 하니 루이는 그자리에서 지금까지 보지못한 새로운시계를 선물하겠다고 약속, 그후 루이는 연구에 연구를 거듭하여 손목시계의 설계도를 완성했다. 루이는 완성된 설계도를 갖고 [재커&루컬트]사의 에드먼드재커(Edmond Jaeger) 를 찾아간다 .창조의 천재 루이 까르띠에와 기술의 천재 에드먼드 재커, 이 두 천재가 20세기 손목시계의 역사를 창조하는 순간이었다. 루이는 에드먼드에게 "이 도면대로 시계를 만들어 주시오. 앞으로는 생활하는데 회중시계는 불편하며, 손목시계의 시대가 열릴 것"이라고 했다. 도면을 꼼꼼히 살피던 에드먼드는 감탄을 하며 "이 시계는 과연 그럴 것이오, 하지만 지금의 회중시계로는 이정도로 작고 정밀하게 만드는 것이 불가능하니 나에게 2~3년의 시간을 주시오. 필히 내 손으로 이것을 만들어 보겠소"라며 1904년, 에드먼드는 약속대로 루이가 설계한 시계를 만들었다. 루이는 물론, 그 시계를 친구인 알베르토 산토스 듀몽에게 선물, 시계이름을 친구 이름을 따 '산토스'로 한 것. 산토스는 1906년 자기가 제작한 비행기로 유럽일대를 비행, 꿈이 이루어졌다. 산토스 시계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결국, 창조.기술.모험 삼위일체의 결실이었던 것.
이후 1907년, 에드몬드 에거와 공동 작업으로 만들어 특허를 받은 손목시계 버클과 1919년 제1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끈 군용 차량에서 이름을 딴 '탱크' 디자인이 탄생하게 됐다. 루이 까르띠에의 경영 하에서, 개혁은 꾸준히 진행되었다. 의심의 여지없이 그는 모든 형태의 보석 예술을 진보시켰으며 보석류, 시계, 악세서리의 예술 표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로 올려놓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까르띠에의 예술'이라 칭송. 동시에 그는 고가품 시장을 새로이 열기 위한 기반을 구축했다.명품 까르띠에 시계 처음 루이는 까르띠에 만의 보석디자인, 세공을 응용해 벽시계, 벽탁상 시계를 만들기 시작했고, 1923년에는 예술미와 기술의 조화를 이룬 포르티코 미스터리 클락 Portico Mystery Clock을 제작, 특허권을 얻었다. 이후 당대 뛰어난 전문가들에 의해 성능을 개발, 향상시키면서 그 기술의 바탕으로 제작된 손목시계 버클이 특허권을 얻어 시계의 제조 역사에 커다란 공헌을 하게 된 것. 우수한 디자이너, 시계 기술자, 감정사, 세공전문가, 광택전문가들의 손을 거쳐 만들어진 시계는, 최상의 소재만을 사용하여 대부분 왕실과 귀족, 대부호들의 애장품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이러한 명성은 엄격한 소재의 선택과 완벽한 세공, 제조 기술에 의한 것으로 지금까지 굳건하게 전통으로 이어져 오고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보석시계인 까르띠에 시계들은 지난 날의 시대상들을 반영하면서 현대의 여러 시계 라인의 개발로 이어지고 있다.
까르띠에 주요 시계라인
1888년 산토스 Santos
시대에 맞는 디자인과 기능으로 변신을 거듭, 1994년에 현대적 감각과 스포티한 디자인으로 재탄생하게 된다.1917년 탱크 Tank
1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탄생. 사각형 형태를 가진 시계로 단순하면서도 화려한 디자인으로 제작, 그후 9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현대적이고 젊음을 상징하는 시계로 평가받고 있다.1924년 트리니티 Triniti
화이트골드, 옐로우 골드 그리고 핑크 골드의 세 가지 색의 골드가 조화를 이룬 시계. 이 시계는 여성스런 아름다움을 잘 표현하고 있다.1933년 팬더(Panthere) 시계
까르띠가 만들어낸 다양한 종류의 식물과 동물 컬렉션 중 하나. 야생적 이미지를 보석가에 의해 재편집, 제작한 팬더시계는 미의 상징을 담고 있으며 귀족적 패션 분위기를 내고 있다.
팬더시계가 생산된 해인 1933년, 당시 모로코의 중서부 왕국, 마라케시의 파샤 왕자를 위해 파샤(Pasha)시계가 제작되었고, 이 시계는 여러 형태의 변화를 거쳐 현재는 총 44종류의 모델을 가지고 있다. 역동적이고 현대적인 이미지를 나타내며, 최근에는 파샤크로노그라프 시계가 생산되고 있다.
대중적인 분야로의 확장 1923년 꺄르띠에는 기존의 고급스러운 오뜨 꾸뛰르적인 보석제작에서부터 보다 광범위하고 대중적인 것으로 사업 영역을 확장한다. LES MUST DE CARTIER가 바로 그것. 또한 이 시대부터 플래티넘과 수정이 유행, 수수하고 근대적인 꺄르띠에의 디자인이 많은 주목을 받게 된다. 또한 그 당시 자연주의로의 회귀를 느끼고 꽃, 식물, 팬더와 호랑이 같은 동물상들도 만들기 시작한다. 오늘날 꺄르띠에의 상징처럼 여겨지는 모티브들은 이때부터 준비되고 지속적으로 발전되어 온 것. 꺄르띠에의 경영과 개혁은 끊임없이 지속되었다. 그는 모든 형태의 보석 예술을 진보시켰으며 보석류, 시계 액세서리를 예술 표현에 있어서 최고의 경지로 올려 두었고, 오늘날 사람들은 그것을 꺄르띠에의 예술이라 칭송한다. 많은 역사적인 순간에도 꺄르띠에의 활약은 눈부셨다. 1901년 웨일즈의 왕자는 꺄르띠에는 왕들의 보석상이라고 선언하며 대관식을 위해 엄청난 보석을 주문했고, 1969년 리차드 버튼은 엘리자베스 테일러에게 생일 선물로 69캐럿짜리 꺄르띠에의 다이아몬드를 선물하기도 했다. 코코 샤넬은 시인 쟝 꼭또가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에 임명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3캐럿짜리 에메랄드가 박힌 칼을 선물하기도 했다. 자칫 새롭고 모던한 것만이 가치 있어 보일 법도 한 현대에도 꺄르띠에는 흉내낼 수 없는 고유의 클래식함으로 신비한 매력을 전하고 있다.
까르띠에 콜렉션
JEWELRY
르 베제 뒤 드라공(용의 키스), 펭링, 위시넷, 제이드, 패드룩, 드래곤, 세레머니, 애니멀, 드라퍼, 펄, 파베, 아이콘, 링크, 컬러, 레이스
WATCHES
탱크, 파샤 드 까르띠에 워치, 베누와, 로드스터, 팡테르 드 까르띠에, 라니에르, 산토스 드 까르띠에
ACCESSORIES
까르나씨에, 까쥬 드 까르띠에, 해피 버스데이, 팡테르 드 까르띠에, 필기류, 라이터, 아이웨어, 향수